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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않은 길' 이야기
삶은 돌발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은 즐겁다. ('09.08.06) 본문
하늘에 큼지막한 구멍이라도 생겼는지, 답답한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며칠째 쉬지 않고 장맛비가 쏟아질 때였다. 괜스레 울적한 마음이 들어, 입대하고 지금 까지 기록해왔던 수첩들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군 생활의 추억과 미래의 기약, 휴가에 대한 설렌 맘의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일 년쯤 된 글을 발견한 것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충성! 신고합니다. 이병 엄한결은 2008년 7월 31일부로 이병에서 일병으로의 1계급 진급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8월이다. 에너지 한 칸을 더 채운 나는 대한민국 육군 일병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변한 것은 느끼지 못할 만큼 조금 더 무거워진 전투모와 전투복, 그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두 줄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련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소원을 이룬 내게 그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바라보는 것은 세 줄이고 네 줄이며 전역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 뿐이리라. 기껏해야 700일뿐인 군 생활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내게 다가온다. 하루하루 변함이나 새로움 따위를 느끼지 못한 채 말이다. 조금만 모이면 큰 변화를 이루는 동일한 하루하루의 날들 속에 이병인 어제와 일병인 오늘은 고작 ‘ㄹ' 하나 차이인 것이다. 일병을 간절히 바라던 그 때와 지금의 나는 분명히 변했다. 하루하루가 똑같고, 변함이 없다 해도 일 년 전의 나와 일 년 후의 내가 같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 년 후의 나는 어떠할 것인가… 동일한 하루하루인 오늘, 내일을 통해 점점 새롭게 만들어 나가자!
군문(軍門)을 들어서며 생긴 양습(良習), 일기는 아니어도 순간순간 스치는 기억과 생각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아까워 남겨두었던 흔적이 다시 읽히는 본연의 목적을 다 했음에도 ‘괜한 짓을 한건가?’ 생각나게 한 것은, 아마도 내가 일 년 전에 비해 변한 것이 없음을, 현재에 충실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모여 수첩이 기약했던 1년이 흘러버린 지금, 내 모습 어디에서도 그 때와는 다른 새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수첩의 글은, 비단 ‘하루하루의 새로움을 추구하자’ 는 내용만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새로움과 삶의 활력에 대한 경고장이었다. 하루에서 의미를 찾아 일 년 후 큰 변화를 이루겠다던 계획이, 매너리즘이라는 복병에 의해 무너진 것에 대한 경고장.
‘삶을 돌발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은 즐겁다.’
답답한 내 마음을 속 시원히 털어 놓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전화기뿐인 듯 했다. 가족에서 친구까지 닥치는 대로 전화를 하던 중, 마침 서울에서 의무경찰로 복무중인 친구와 통화를 할 때였다. 한숨소리 섞인 하소연을 연거푸 늘어놓자 친구가 하는 말 이었다.
같은 의무복무라지만, 근무환경은 천지차이였다. 여름에는 풀과, 겨울에는 눈과 싸우는 등의 작업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산꼭대기 통신소에 앉아지내는 나와는 달랐다. 친구의 환경은 하루하루가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다시 말하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환경이었다. 시위대를 진압 하는 일부터 음주 운전자와 싸우는 일, 폭주족을 소탕하는 일 등 하루 24시간 온전히 마음 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널리 사용되는 명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가 날 위해 해준 그 말은, 그 어떤 명언보다, 그 어떤 대답보다 속 시원한 해답으로 들렸다.
만약 나를 친구와 같은 상황에 갔다 놨더라면, 난 평온하고 단조로운 삶이 그리웠을 것이다. 내 문제의 답은 바로 어려운 여건 임에도, 그 여건 자체를 즐거워하는 친구였다. 친구의 상황을 알게 되고, 내 상황을 바라봤다. 물론 내 하루하루가 항상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상황이라 자부 할 수 있었고, 또 같은 틀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항상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후로 친구의 한마디를 내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니 삶에 점차 새로움이 더해졌다. 이제까지는 아무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들이 의미 있는 상황으로 다가왔다. 아침마다 새로운 날씨, 매일 새롭게 짜인 식단들은 물론이거니와 선․후임들과의 관계와 또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 등 모든 것이 즐겁고 새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친구의 그 한마디의 말은, 단조롭던 내 삶을 즐겁게 변화시켰다.
이제 나는, 말 한마디의 힘을 믿는다. 물론 말 한마디가 내 군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군 생활을 즐겁게 보는 시선을 선물한 것만으로도 말의 힘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으레 지겹고 힘들기 마련인 군 생활이 즐거워졌으니, 앞으로 남은 더욱 많은 삶도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돌발적인 상황들을 발견하고, 그 상황을 즐겁게 바라보는 시선이 차츰 습관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부대원들을 보면, ‘군 생활 지겨워’ 라는 소리가 마치 노래가사마냥 흘러나온다. 왁자지껄 한바탕의 즐거운 대화에도 버릇처럼 새나오는 그 소리는, 군 생활의 답답함을 자신도 모르게 토로하는 것 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군 생활은 결코 지겹지 않다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군 생활은 돌발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그래서 군 생활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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