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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가지않은 길' 이야기 (33)
'가지않은 길' 이야기
하노이에 산지 벌써 햇수로 6년이나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았고, 앞으로도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도시를 떠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 하노이는 내 삶의 완전한 두번째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특별히 하노이에 살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다. 베트남을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나라의 수도(Capital)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뿐이다. 그 때의 선택이 지금 와서는 바꿀 수 없는 삶의 배경이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전라북도의 전주全州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학창시절 대부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전주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도시지만 광역시도 아니고, 이렇다 할 산업군이 발달하지 못해 공단이나 대기업, 일자리를 찾기 힘든 곳이다. 한편으로는 무료한 도시지만 한자어 풀이인 ‘全’ (온전할..
베트남의 일자리는 한국에서 보통 '일한다' 할 때 상상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다. 사무실의 전경, 직장의 위치와 근무환경, 회사 내에서 주어진 역할까지 모든 것이 판이하다. 요즘 들어 스타트업이나 서비스업종 등 도시의 화이트칼라 일거리가 많이 늘고 있다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베트남 최대 규모의 투자 국가이고 대부분의 투자는 전자와 봉제 등 공장 제조업에 집중되어있다. 염가의 인건비로 주 6일을 일하는 베트남에서 반듯한 넥타이를 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출근하는 풍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베트남에 가기로 결정하던 순간에도 이런 근로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한 전자회사를 베트남 첫 번째 직장으로 고민할 무렵에야 공장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군대도 다녀왔고, ..
베트남의 일자리는 한국에서 보통 '일한다' 할 때 상상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다. 사무실의 전경, 직장의 위치와 근무환경, 회사 내에서 주어진 역할까지 모든 것이 판이하다. 요즘 들어 스타트업이나 서비스업종 등 도시의 화이트칼라 일거리가 많이 늘고 있다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베트남 최대 규모의 투자 국가이고 대부분의 투자는 전자와 봉제 등 공장 제조업에 집중되어있다. 염가의 인건비로 주 6일을 일하는 베트남에서 반듯한 넥타이를 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출근하는 풍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베트남에 가기로 결정하던 순간에도 이런 근로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한 전자회사를 베트남 첫 번째 직장으로 고민할 무렵에야 공장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군대도 다녀왔고, ..

스물 아홉 살 되던 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 베트남에서의 첫번째 입국 수속을 마치고 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낯설지만 정복해야 하는 도시, 하노이 시내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평소 같았다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서 신기함 혹은 호기심 따위의 단순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을 테다. 여행이 아닌 새로운 도전의 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만나게 된 베트남에서, 나는 그런 쉽고 가벼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흡사 학업과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입영 통지서를 들고 논산 훈련소로 향했던 과거의 모습과 같았다. 나는 사뭇 진중하고 약간은 근엄한 생각에 잠겼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류했다. 이유인 즉, 구름을 ..
베트남에 오기 전, 나는 소위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인 H사에 다녔다. 높은 연봉과 거액의 성과급 그리고 각종 복지제도까지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회사 밖에서는 명함을 주며 어깨가 으쓱해졌고, 출 퇴근길에 목에 건 사원증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으나, 다시 회사 안으로 돌아오면 나는 수만 명의 직원 중 한 명의 신입사원일 뿐이며,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나사 조각에 불과했다. 2014년 무더운 여름에 입사했던 직장에 일 년 만에 사직서를 냈고, 이듬해 가을이 오기 전 나는 베트남 하노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둔 건지, 후회하지는 않는지, 왜 하필 베트남에 온 것인지를 물었다.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연봉과 ..
베트남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 참 많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하나는 저렴한 물가가 주는 씀씀이의 여유나 경제 활동의 안정감 같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코가 높고 피부가 하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느낄 법한 외국인 프리미엄을 갖는 것이다. 코도 낮고 피부도 검은 내가 한국말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호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베트남이 나에게 주는 일종의 은혜 같은 것이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베트남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사고의 유연성과 생각의 확장성이다. 새로운 사업기회 찾기, 부자 될 궁리 따위에 관한 것이다. 나의 창의력과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그 생각을 확장시키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연구해 봤지만 찾아보면 다 있었고..
사랑하시어 오시었던 그분의 온기로 인해 마음만은 언제나 따뜻한 연말연시이다. 한 해의 끝을 맞아 모처럼 홀로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캐럴 송이 울려 퍼지고, 거리의 네온들은 붉고 하얀 성탄의 빛깔로 옷을 갈아입었다. 냉랭하게만 느껴지는 십이월의 서울이지만 마냥 차갑지만은 않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밤거리는, 계절의 변화에 무감각한 채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나의 삶에, 지나온 해 돌이킬 짧은 여유를 선물한다. 나의 이십 대, 마지막 나이를 살아갈 2015년이 이제 곧 이르더라도, 꽁꽁 언 겨울은 변함없이 그대로 일 테지만, 해의 변곡점을 앞둔 지금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점검하기에 최고의 순간이다. 올해 만큼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던 해가 있었나 싶다. 일 년 전 이맘때와 비교해보면, 신분은 학생에서 직장인으..
서평을 기록하기에 앞서서, 책의 저자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 스스로도 다사다난 했던 인생사가 가져온 자신의 다양한 호칭에 대해서 딱히 정리하지 못하겠다 했으니,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 할 것은 없다. 저자 유시민씨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마인쯔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언론사에서 일을 했으며, 시사토론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100분 토론 진행자로 활약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캠프를 지원하기 위해 제 3의 진보정당을 창당 했고, 그러한 인연으로 임기 1년 짜리 국회의원이 됐다. 탄핵 역풍을 맞고 치뤄진 총선에서 제대로 된 국회의원 뱃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달았다. 국회의원 재직 중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한때는 야권의..
나는 글쓰기가 좋다. 글쓰기는 형체가 없는 생각에 옷을 입히는 행위다. 말은 뱉음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지만,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사랑 고백은 금세 자취를 감추지만, 작은 엽서에 글로 담은 진심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생각과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만, 글로 남기면 영원히 간직 할 수 있는 추억이 된다. 나는 이런 글쓰기가 좋다. '대한민국 이공계는 글쓰기가 어렵다.' 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난 경험을 종합 하면, 글쓰기의 어려움은 비단 공대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는 이공계를 나왔지만, 글쓰기를 어려워 하지 않는다.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즐기면서 쓸 수는 있다. 나에게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창작의 시간이..
아이리버라는 브랜드를 처음으로 접한 때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시절, 2003년으로 기억된다. 브랜드가 어떻고, 상품성은 어떻다는 관념이 별로 없을 때였다. 아이리버는 그저 이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의 대상이었고,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비싼 가격에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하던 아이리버 MP3 제품을 공짜로 얻었던 그 때를 분명히 기억한다. 모 온라인 인터넷 강의 사이트의 이벤트에 당첨되어서였다. IFP-100 아마도 128Mb를 저장할 수 있는 크래프트 타입의 파란색 모델이었던 것 같다. MP3플레이어가 하나 더 있던 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Panasonic에서 만든 친구의 CD Player와 내 아이리버 MP3플레이어를 교환하고 만다. 지금은 그 추억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다시 만..